‘日日是好劍(보)’

                                  정웅

 

연하장이라든가, 축하메세지에 즐겨 쓰는 문구(덕담) 중의 하나가

‘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 날이 되소서)이다.

이는 당나라 운문종(雲門宗)의 종주(宗主)인

운문문언(雲門文偃, 865-940)선사의 법문에서 유래하였단다.

어느 보름날 법문을 하시다 대중에게 묻기를

“보름전은 묻지 않겠거니와 보름 후는 어떠한가?”라는 선문(禪問)이다.

이때 대중이 잠잠해 있자

“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 날)!”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였다고 한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사는 일이 진정한 중생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날그날이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안다면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살아야 한다 함일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과거에 대한 미련도 집착 말아야 한단다.

‘지금-여기’에서 ‘열심히 즐겁게’ 사는 것이 수양이고,

평상의 道라 함이리라.


疾風怒雨 禽鳥戚戚 질풍노우 금조척척

霽日光風 草木欣欣 제일광풍 초목흔흔

可見天地 不可一日無和氣 가견천지 불가일일무화기

人心 不可一日無喜神 인심 불가일일무희신

세찬 바람과 성난 빗줄기에는 새들도 근심하고

개인 날씨 맑은 바람에는 초목도 기뻐하니

천지에는 하루도 화기(和氣)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 마음엔 하루도 즐거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菜根譚>


무언가 열심히 한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무언가 즐겁게 한다는 것은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어려서 동네 친구들과 ‘놀이 삼매’에 빠져 숙제는 물론이고

끼니도 잊고 노는데 열심인 경험이 있으리라.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요, 무아, 몰아이다.  


신라 때 백결(百結)선생 이야기다.

섣달 그믐날, 남들은 떡방아를 찧어 떡을 만들어 설 쇨 준비에 바빴으니,

가난뱅이 아내, 참다못해 설 차림 하소연을 하였다.

이에 백결선생은 거문고를 들고 ‘방아 타령’을 뜯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대악(碓樂, 오늘날 전해지지 않음)으로

동네 사람들이 백결선생 집에서도 떡방아를 찧는 줄 알았단다.

얼마나 열심이었을까? 얼마나 즐거웠을까?

‘대악삼매’의 경지를 알 듯싶다.


흔히 ‘전문가(프로패셔날)’라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이다.

무념무상, 무아지경, 몰아, ‘삼매’에 빠진 사람들이다.

정주영, 조수미, 조용필, 김연아 등이 그렇다.

“1등을 위해 스케이팅을 했다면 훨씬 전에 그만뒀을지 몰라요.

...연기할 때 떠오르는 그 즐거움, 발끝의 느낌을 잊지 못해요[김연아].”

에디슨은 "나는 단 하루도 일한 적이 없다. 항상 즐겼을 뿐이다"라고 했다든가?


‘검도삼매’라고 한다면,

열심히 하니 즐겁고, 즐거우니 열심히 하게 되는

그래서 무념무상해지는 경지가 아닐까? ‘대악삼매’에 비유될까마는,

유난했던 더위도 꼬리를 내렸으렷다.

日日是好劍(날마다 즐거운 검이 되소서)

(20100829'說劍')  



***

행동의 동기와 목적을 즐거움(快)에 근거한다는 것이 쾌락주의의 출발이다.

그러나 진정한 쾌락은 바르지 않으면 고통임을 인간은 성찰하게 된다.

‘즐거워야’[목적론]하지만 ‘바르게’[의무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도뿐이랴?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이 짧다고만 할 것인가?’   (0) 2010.04.25
‘피그말리온 효과'  (0) 2010.03.06
사계(四戒)  (0) 2005.10.03
삼위일체  (0) 2005.10.03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칼이 짧다고만 할 것인가?’


언제가 법회에서 들은 ‘돌 잔칫날 덕담’이다.

한손님은 아기의 상을 보니 장관이 되겠다고 하고, 또 한사람은 큰 부자가 될 것 이라고 했단다. 세 번째 손님은 ‘이 아기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했다가 음식대접은커녕 매만 맞고 돌아갔다고 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확실한 진실이 있는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있는 것은 없어지며,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진실을 외면하고 온갖 감언에 솔깃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얼마 전 서울의 몇몇이 투병 중(불치예고)인 친구를 문병차 시골을 다녀왔다.

그렇게 우람하던 사람이 이렇게도 마르는구나, 등뼈가 만져지는 손끝에 목이 메는데, 부인을 가리키며 “가벼워 좋지 뭐, 저사람 언제 나를 번쩍 들어봤나?”, 교회집사이기도한 믿음만큼이나 유머로 늘 우리들을 매료시켰던 그다. 한때는 나의 전도(?)에 감화되어 열심히 검도수련을 했었는데, 고통이 역역한데도 일상의 얘기로 충만하는 ‘여전한 도전적’인 그에게서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저렇게 안온히 맞이할 수가 있구나!’ 그의 강한 신앙심과  부지런함(不放逸)이 귀경길 차 속내내 생생하다.


發行不放逸 바른 행으로 방일(게으름)하지 않아

約以自調心 스스로 조심하기로 약조하니,

慧能作錠明 지혜를 등불삼아 살아가며

不返冥淵中 어두운 심연에 빠지지 않으리라.


愚人意難解 어리석은 자는 이를 알지 못해

貪亂好諍訟 탐욕에 빠져 다투기 좋아하고,

上智常重愼 지혜로운 자는 항상 삼가서

護斯爲寶尊 보배처럼 부지런함을 지킨다.<법구경 ‘放逸品’> 


“일어나라. 앉아 있으라. 잠잔다고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있으랴. 화살에 맞아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잠이 있겠는가(수타니파타).” 우리에게 이미 괴로움(번뇌)의 화살이 꽂혀 있다. 잠잔다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가?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도록 화살을 뽑아 버리고 약을 발라 상처를 아물게 해야 한다. 뽑는 것이 고충일지라도 잠에서 일어나 앉아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 잠잘 시간이 있는가? 죽음은 도둑처럼 몰래 오는데...


어느 모임에서의 연사의 말이다.

전투시에는 칼이 길수록 유리함이 당연한데, 고대 로마시대의 검투사들의 칼은 비교적 짧단다. 특히 장수들의 칼이 그러하단다. 그 이유를 ‘칼이 짧으면 짧을수록 긴 칼을 가진 사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싸우라’라는 메시지란다. 즉 ‘도전성’을 비유함이다. 칼이 짧다고만 하여 뒤로 물러 설 것이가? 앞으로 나아감이 유리하다는 것이 자명하다. 도전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칼이 짧다고만 할 것인가?

키가 작다고만 할 것인가? 나이가 많다고만 할 것인가? 나이가 작다고만 할 것인가? 손목이 약하다고만 할 것인가? 허리가 약하다고만 할 것인가? 몸싸움에 약하다고만 할 것인가? 시간이 없다고만 할 것인가? 칼은 이미 손에 쥐어졌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할 것이다. 일어나야 한다. 방심할 수 없다. 어려움은 어디에도 도사리고 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도장에서도, 그 밖에도 화살은 이미 꽂혀 있다. 도전정신과  믿음으로 부지런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200306).

 

***

‘고통이 가득한 만큼, 극복할 길도 있다(헬렌켈라)’고 했습니다.

두려운 것은 고통이 아니라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랍니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면서 성숙해지며 세계도 넓어진답니다.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日日是好劍(보)’  (0) 2010.08.29
‘피그말리온 효과'  (0) 2010.03.06
사계(四戒)  (0) 2005.10.03
삼위일체  (0) 2005.10.03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피그말리온 효과'


기대(期待)한 만큼 결과(結果)한다는 학습심리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하여 교육현장에서 강조되고 있다. 스승의 애정 어린 기대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다양하게 실증된 바다(지나친 기대와 관심이 시합을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칭찬과 꾸지람(carrot & stick)’은 전형적인 학습강화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칭찬이 보다 교육적이고 효과적이란다.


*Pygmalion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기피증이 있는 조각가로, 뭇 여성들을 혐오하지만 오직 자신이 상아로 조각한 ‘여인상’을 그리며 신에게 상아조각상 같은 여인을 점지해줄 것을 매일같이 기원하는바, 아프로디테가 감복되어 어느 날 조각상에 입을 맞추는 순간 마침내 기대하던 여자로 변신하여 아내로 맞게 한다.


칭찬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이다. 칭찬은 에너지를 확대시켜, 육체에 건강을 주고, 상처받은 마음에 휴식과 힘을 주는 생명력의 공급원이 된다. 실험에 의하면 피로에 지쳐 있는 학생에게 칭찬을 해주니 엘고그래프(ergograph : 원기측정)가 상승하고, 꾸중하거나 실망시키는 말을 하니 원기(元氣)가 급강하 하였다고 한다. 식물 까지도 그 효과가 검증되어 활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물까지도 칭찬을 하면 결정(結晶)이 달라지는 미세한 현상이 카메라에 잡힌단다.


줄리엣 그레코(Juliette Greco, 프랑스 샹송가수, 언제나 검은 옷을 입은, 우수가득한 눈, ‘로망스’ ‘고엽’)는 퀭한 눈에 우뚝 선 코를 가진 그저 볼품없는 무명가수에 불과하였단다. 그러던 그녀가 자신의 외모에 용기를 갖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눈'에 관한 어떤 손님의 칭찬 때문이었다고 한다. 샹쥬르망 거리에 있는 한 삼류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던 어느 날 손님으로부터 "저 아가씨의 눈에는 백만 볼트의 전압이 번쩍여!"란 지나치는 말을 엿들었단다. 이 날 이후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속눈썹 화장 외에는 그 어떤 화장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모의 자신감은 노래에도 감염되었음은 물론이다.


2차대전시 미육군에서 조사연구한 ‘전투심리’에 의하면 병사는 칭찬하는 상사를 따른단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칭찬이라는 사기를 먹고 산다. 이 같은 인간심리를 전장(戰場)에 이용한 사람은 2차대전 보다 훨씬 앞선 나폴레옹이 아닌가 싶다. 나폴레옹 만큼 많은 훈장과 상을 남발(?)한 장군은 드물다고 한다. 훈장, 계급장, 메달, 표창이 무엇인가? 쇠붙이, 깡통, 종이일 뿐인데도, 훈장 하나에 노구의 장수들이 젊은 나폴레옹 장군의 군화에 이마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하며 전진 또 전진하지 않았는가? 지친병사들에게 “저기 산을 넘으면 술과 음식이 기다린다! 모두가 제군들의 것이다!”라고 했다던가? 늙은 장수도 젊은 병사도 칭찬과 기대는 생명수다.


칭찬 받기가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칭찬하기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상사로부터, 부하로부터, 부모로부터, 자식으로부터, 아내에게서, 남편에게서 칭찬 받기가 힘들다. 경제는 어렵고 사회이슈는 넘친다. 모두가 적이고 내편은 없는 듯싶다. 지위와 역할이 혼돈스러우니 두 주먹만 불끈 쥐고 도대체 펼 줄을 모른다. 긴장하니 더욱 여유가 없다. 정말, 따뜻한 말 한마디, 미소를 지을 틈이 없을까?


틈은 있다. 하나님도 인정하는 거짓말이 있다. 친구부인의 예쁘다는 칭찬과 물건을 산 친구에게 잘 샀다고 칭찬하는 거짓말이란다. 이 같은 칭찬 한마디는 에너지가 되어 성공 동기의 인센티브작용을 하는 돈 안 드는 값진 선물이다. 예컨대, ‘도복 다림질 솜씨’라도 좋다. 눈이 크다든가, 죽도가 예쁘다고 해도 괜찮다 - 이런 선물은 정말로 단정한 몸매에, 심안(心眼)으로 깨끗한 단판 머리기술이 될 수 있음은 물론, 일상으로까지 연결되어 에너지를 불어 넣어 줄 것이다. ‘검도카페’까지 성업 중이니, 쉽고 돈 안 드는 칭찬과 격려, 감사와 미소에 검우들이 인색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꿈나무들이 많지 않은가?

 

 

***

‘괜찮은 사람’이란 말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괜찮은 상대’를 만나기도 쉽지 않구요.

허나, 칭찬을 하다보면 다 ‘괜찮아’진답니다.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日日是好劍(보)’  (0) 2010.08.29
‘칼이 짧다고만 할 것인가?’   (0) 2010.04.25
사계(四戒)  (0) 2005.10.03
삼위일체  (0) 2005.10.03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四戒’一考 <處變不驚;어떤 변화에도 놀라지 않아야> (136)


‘4가지의 경계(四戒)’,

이른바 놀라움(驚), 두려움(懼), 의심(疑), 망설임(惑)의 경계는 검도인들의 화두(話頭)이며

검도수련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목표이기도 하다.

놀라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며 의심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 일상은

검도인 뿐만 아니라 모두의 바램 일 것이다.

중국 근대화의 지도자 등소평(鄧小平,1904-1997)의 좌우명이

‘처변불경(處變不驚)’이었다고 한다.

즉, ‘어떠한 변화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놀라운 변화 속’에서 중국을 견인해온 지도자이다.

‘큰 사람’은 놀라지 않는가보다. 평상심으로 일관한 지도자의 일면을 보는 듯싶다.


우리의 일상은 ‘四戒’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썩은 새끼줄에 (뱀인 줄)놀라는가 하면 자동차의 경적에도 깜짝 놀란다.

리포트 발표가 두려운가 하면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올수록 두렵기도 하다.

이웃의 친절에 까닭없이 의심을 하는가하면,

기껏 준비하고도 "사랑해!"엔 망설인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거지는

이렇게 놀라고 두렵고 의심하고 망설임 속에서 많은 일들을 그르친다.

어떻게 하면 사계로부터 벗어날까? 다른 말로 어떻게 하면 평상심을 지닐까?

얼마나 어려우면 선지자들은 ‘平常心是道’라고 하였을까?

또한 대부분의 검도관 관훈이 ‘평상심’이고 보면 그 어려움이 엿보인다.


나름대로의 연습을 하고 평상한(?) 마음으로 시합장에 들어서지만,

놀라고(驚) 두렵다(懼). 자신이 없고(疑) 망설여(惑)진다.

예컨대, 의외의 키 큰 상대라든가 또는 사자후에 놀란다.

주변의 분위기가 불안하고 상대의 눈빛도 두렵다.

그런가 하면 예측을 할 수가 없으니, 상대가 어떤 기술로 나올까 의심스럽기만 하다.

지금이 공격할 시점인지, 머리를 공격해야 할지 주저하고 망설여진다.

승패도 모르고 시합이 끝날 때가 있다.

캐리어가 쌓이고 수련강도에 따라 양상은 다르겠지만 별 수준 차이가 없음에 회의를 느끼며 고민한다.

그 동안 갈고 닦은 기량에 자괴감에 젖는다.


무사란 생사를 가름하는 대치국면에서 놀라고 두렵고 의심하고 망설이지 않는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도 승자라는 보장이 없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죽음을 바라보며 승패에 초연한 ‘수행자’가 무사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수많은 ‘죽기연습’을 통해

생사로부터 초연한 평상심의 지평을 넓히는 일상이 무사의 ‘도(길)’이었을 것이다.

지금 21세기 무사는 없다. 또한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검의 도(길)’는 여전하다.

이른바 활인검으로서 자기완성의 도(길)이다.

검이란 이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도구일 뿐이다.

‘어떤 변화에도 놀라지 않는’ 일상을 검도에서 훈습하는 것이다.


미야모도 무사시는 ‘칼을 대신할 수 있는 몸’일 때가 ‘공(空)한 마음’이라고 했다.

마음을 비우면(공한 마음) 놀라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단다.

어린 아기들은 驚懼疑惑(놀람, 두려움, 의심, 망설임)이 없다.

엄마의 손짓으로 ‘경구의혹’없이 벼랑에서도 뛰어 내린다.

엄마에 대한 믿음으로 몸을 던진다.

‘검도’에 대한 믿음으로 몸을 ‘던지란다’ ‘버리란다’ ‘죽이란다’.

잔머리(識)로 물들어(色) 칼만 앞서면 사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단련(鍛鍊;1만일의 수련)’뒤에나 이해할 수 있을까?


“사계(四戒)란 경구의혹(驚懼疑惑)을 말한다. 그 중 하나라도 마음속에 있다면 마음은 혼란되어 상대에게 틈이 있어도 발견할 수가 없고, 자신이 위축되어 틈이 생긴다. 경(驚)이란 예기하지 않았던 일이 생겨 마음이 동요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일시 심신의 활동이 혼란되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 적당한 조치를 취할 수 가 없다. 구(懼)란 공포이며 그것이 정신활동을 침체시켜 손발의 활동을 잃게 한다. 상대의 체격이 크다고 해서, 기합소리가 크다고 해서, 또 상대의 허세에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된다. 의(疑)란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서 의심을 가졌을 때는 정상적인 마음으로 판단할 수가 없어 결단을 내리지 못 한다. 혹(惑)이란 마음이 방황하여 정신이 침체되어 신속한 판단, 경쾌한 행동을 취할 수 없게 된다.”(대한검도회 ‘용어정의’)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이 짧다고만 할 것인가?’   (0) 2010.04.25
‘피그말리온 효과'  (0) 2010.03.06
삼위일체  (0) 2005.10.03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컴플렉스  (0) 2005.10.03
 

‘三位一體’一考 <지·검·체가 하나가 되어야> (135)


일상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를테면 정부 캠페인의 하나로 익숙하게 들어온

‘민·관·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환경보호에 힘쓰자’를 비롯하여,

교육현장에서는 교사·학생·학부모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학습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경제현장에서는 ‘정부의 잘못된 대책과 카드사(기업)의 방만한 경영, 소비자의 신용의식 부재’가 삼위일체가 되어 신용불량자를 양산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부·모·자식의 삼위일체야 말로 가정화합의 근간임은 말할 나위 없다고 열을 올린다. 아무튼 세 가지만 있으면 써먹을 수 있는 에너지 상승작용의 상징적인 용어가 바로 ‘삼위일체’가 아닌가 싶다.


숫자의 상징성은 신비할 정도로 우주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 영향력을 미쳐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숫자로서 ‘3’은 창조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통합(조화)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3’은 ‘모든’이라는 의미의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라고 한다. 이른바 1(양)과 2(음)가 합쳐져 만들어진 숫자이며, 즉 음양이 합해진 숫자이기 때문에 음양이 하나로 된다고 한다. 1이 양을, 2가 음을 뜻하는 숫자라면 3은 음과 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완전한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3이 상징하는 바는 창조이면서 통합(조화)이기도 하다.


삼위일체는 이 같은 ‘3’이라는 상징성(창조·통합)에서 비롯되는바 종교적 의미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의 삼위일체를 신앙의 요지로 하고 있는 기독교가 그렇고, 불교도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부처(佛), 부처의 가르침(法), 스님(僧)에 귀의할 것을 요지로 한다. 도교는 삼재(三才), 즉 天·地·人의 삼신일체를 요지로 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건국신화에서도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이 천제(天帝) 환인(桓因)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왔다는 천부인(天符印),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3인도 창조와 조화의 상징이다.

이렇듯 ‘3’이라는 숫자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래서 선호하며, 창조와 안정·조화의 에너지 작용을 믿기도 한다.


검도에서도 예외 없이 삼위일체를 강조한다.

기(氣)·검(劍)·체(體)일치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심기력(心氣力) 일치, 심형도(心形刀)일치, 심안족(心眼足) 일치 등이 있으나

대체로 몸과 마음 그리고 검을 의미하는 기검체(氣劍體) 일치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기검체 일치야말로 검도의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기는 의욕과 기력을 뜻하며 검은 검의 적절한 사용을 뜻하고,

체는 공격 동작에 요구되는 신체 각부의 근육의 힘과 죽도를 쥐는 힘, 타격, 그리고 신체 이동을 뜻한다. 이와 같이 기·검·체는 지극히 타이밍에 일치하고 또한 리드미컬한 공격행동이다’(대한검도회)라고 ‘기검체 일치’를 정의 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표출되는 기검체 일치는 발 구름과 검의 격자 그리고 기합이 동시에 이루어 질 때를 의미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검도경기시 유효격자 조건을 보면 ‘충실한 기세(기)’와 ‘적법한 자세(체)’로 ‘.....올바른 격자(검)’를 충족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어느 하나라도 결한다면 격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족요건’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며, 기준을 세울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심판의 ‘자의성(恣意性)’이 종종 문제되지만 ‘기검체 일치’여부판단은 심판의 권위이며 권한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자족감일 것이다.

단순한 외형적인 조화차원(삼위일체)을 넘어

‘바른 마음(氣)’과 ‘몸가짐(体)’ 그리고 ‘절제된 칼(劍)’이 일체를 이루어

‘3’이 상징하는 창조·조화적 삶의 에너지로 상승작용하는 검도인으로서의 자족일 것이다.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그말리온 효과'  (0) 2010.03.06
사계(四戒)  (0) 2005.10.03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컴플렉스  (0) 2005.10.03
검짱  (0) 2005.10.03
 

‘木鷄之德’ : 을유년! ‘목계(木鷄)’지향의 검도를... (146)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이육사, ‘광야’중에서)

닭이 사자후를 토하면서 을유년(乙酉年) 새벽이 열린다.


닭의 울음을 영역확보를 위한 자기과시의 본능정도로 비하하기도 하지만,

닭의 울음은 단순한 “꼬기오!”가 아닌 세상을 밝히는 사자후(獅子吼)다.

새벽을 여는 자명종으로 세상에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그래서 닭은 ‘태양의 새’로 상징되어 천조(天鳥)로 대우 받기도 한다.

제주도 무속신화인 천지왕 본풀이 서두는 닭의 울음으로 천지개벽을 알린다.

이른바

“천왕닭(天王鷄)이 목을 들고,

지황닭(地王鷄)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人王鷄)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동방(甲乙東方)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닭은 시각과 청각, 촉각으로 발과 부리로 먹이(목표)를 찾는 부지런한 운동성의 조류이다.

봉황도 아니면서 벼슬을 지니고 또 날지도 못하면서 새인 척 한다고 해서 빈축을 사기도 한다.

때로는 ‘오리발’로 희화되는가 하면,

조류이기 때문에 ‘조류독감’으로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세상에 결코 무익하지 않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랑받는 생물이다.

달걀이 없는 세상을,

‘닭갈비’가 없는 춘천을,

삼계탕이 없는 여름을,

씨암탉이 없는 처갓집을 상상해보라.


또한 수탉은 ‘진짜 사나이’를 상징하기도 한다.

수탉은 먹이를 발견하면 결코 먼저 먹지 않는다.

처자를 불러 모아 먹게 하고,

자신은 또 다른 먹이를 찾는데 여념이 없다.

그런가 하면 적을 만나면 처자를 보호하는데 필사적인 ‘의리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닭은 검도인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장자(莊子)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나무닭(木鷄)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싸움닭(鬪鷄)조련사로 유명한 기성자(紀渻子)가

투계(鬪鷄)를 즐기는 주(周)나라 선왕(宣王)의 명령으로 투계조련 결과를 보고하기에 이른다.

“훈련이 다되었느냐?” 하니

“아직 멀었습니다. 무턱대고 허세만 부리고 살기만 띱니다.”

그 후 열흘이 되어 다시 물으니

“아직 덜 됐습니다. 다른 닭 울음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덮치려고 난리를 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또 왕이 물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상대를 노려보기만 하는데 여전히 지지 않으려는 오기를 부립니다.”

그리고 또 열흘이 지났다.

“이제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싸움을 걸어 와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그 초연한 덕(德)이 마치 나무로 깎아 놓은 닭 같습니다.

다른 닭들이 보고는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고 그냥 달아나 버립니다.”

이른바 장자의 ‘목계의 덕(木鷄之德)’이다.


이쯤 되면 무념무상의 경지이다.

검도를 수련정도에 따라 3단계로 나눈다면,

‘싸우는 검도'’에서 ‘즐기는 검도’로, 그리고 ‘수양의 검도(武德)’로 나누어 봄직도 하다.

나는 지금 어느 수련단계일까?

우리가 지향하는 검도는 무엇일까?

검도인에게 강조하는 경계가 있으니 이른바, 사계(四戒)이다.

즉, 놀라움(驚), 두려움(懼), 의심(疑), 주저함(惑)에 대한 경계이다.

을유년 새벽에 발도(拔刀)를 하며

초연히 ‘목계(木鷄)의 덕(德)’을 그려봄도 의미가 있으리라.

(을유년초)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계(四戒)  (0) 2005.10.03
삼위일체  (0) 2005.10.03
컴플렉스  (0) 2005.10.03
검짱  (0) 2005.10.03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  (0) 2005.10.03
 

‘컴플렉스’一考 <장신(長身) 콤플렉스> (134)


유치원에서 막 돌아온 아이가 “엄마! 쌍꺼풀이 뭐야? 난 왜 없어?”라는

상심한 아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어느 신문(‘줌마클럽’)의 주부칼럼은

유년시절 자신의 ‘쌍꺼풀 콤플렉스’를 회상한다.

“쌍꺼풀에 대한 상실감이라. 나 또한 오랜 시간동안 ‘아파했던’ 부분이기에

나는 아이의 한숨이 십분 이해되고도 남았다. 나는 물론 쌍꺼풀이 없다.

쌍꺼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소위 세간에서 얘기하는

‘예쁜 눈’의 자격에 한참이나 미달되는 바람에

눈의 생김새는 오래도록 나의 콤플렉스였다.”(조선일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엄마 눈을 닮지 않은 망아지만한 딸이 언젠가 원망조로

“쌍꺼풀 수술을 할까?”하기에 단호하게 말했었다. “너 얼굴가지고 먹고 살래?”>


콤플렉스(complex)란, 관념복합체라고 번역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이다.

즉, 어떤 감정에 의한 통합된 심적 내용의 집합,

이른바 ‘마음속의 응어리’로 내재화(무의식화)되면 될 수록 강한 병리성향을 지닌다는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이 같은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콤플렉스의 시원은 무의식으로 대표되는

프로이드의 외디프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아닐까 싶다.

프로이드는 성격발달단계이론에서 남근기(男根期:3-5세, 고추를 만지고 노는)에

나타나는 ‘거세공포증’을 외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였다.

이른바, 유아기의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연정(이성으로서의 엄마를 독차지 하고 싶어 하는)이 아버지에 대한

적대심을 가지는 성향 - 그 반대는 에릭트라 컴프렉스(Electra Complex) - 으로,

이 같은 욕구불만(컴플렉스)은 어린시절에 극복해야만 성인(成人)으로서 발전한다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는 성적 장애(성도착, 성결벽 같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교육(유아교육),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단다.

이를테면 권위주의적 아버지가 아니라 보다 자상한 상담자로서 말이다.


콤플렉스는 다양하다. 쌍꺼풀 같은 용모콤플렉스를 비롯하여,

백마 탄 왕자가 아니면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세태변화를 말해주는 ‘바보온달’ 콤플렉스,

그런가 하면 문화적 열등감에서 유래되는 사회문화적 콤플렉스도 얘기되고는 한다.

예컨대 유럽(프랑스)인에 대한 미국인의 열등의식,

구소련연방의 황하의식(黃禍意識: 몽골인 콤플렉스),

우리 민족의 미국 콤플렉스 등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콤플렉스는 자신의 심리적 약점이나 장벽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도전의 대상으로 보아 자기성취를 위한 극복의지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두려운 것은 자신의 약점이 아니라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극복의지가 중요하다.

헬렌 켈라여사나 스티븐 호킹박사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그야 말로 어려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많다.


검도(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지만)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극기차원에서 바람직하기도 하며 성공사례가 소개되기도 한다.

‘월간검도’(7월호)는 재활프로그램으로 검도를 지도하여

정신지체장애자들에게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김소영 여자사범(4단)을 소개하고 있다.

발동작을 가르치는데 몇 개월이 걸렸다니,

‘머리’하고 타격하는 그들의 인내와 성취감은 어떠하였을까?


그런가 하면 ‘장신 콤플렉스’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어쩌면 ‘도끼머리’ ‘어깨메어치기’ ‘한손찌르기’ 등의 변칙은 콤플렉스가 아닐까 싶다.

요즘 나름대로 ‘장신’을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변칙을시도하고 있다.

정면 머리치기가 아니라(정면 머리치기는 ‘손목’역습 우려) 변형 ‘좌 머리치기’이다.

1%의 성공일지라도.....(20040723)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  (0) 2005.10.03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검짱  (0) 2005.10.03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  (0) 2005.10.03
검도일인자...  (0) 2005.10.03
 

‘검짱’一考, <‘검짱’의 조건>(101)


지난 한해 대중문화의 핵심화두 중의 하나가 ‘짱’이 아닐까 싶다.

얼굴이 잘 생겨서 ‘얼짱’,

몸매가 끝내주는 ‘몸짱’,

노래를 휘어잡는 ‘노래방짱’....

이른바 최고를 뜻하는 은어로 인터넷에서 시작되어 대중문화의 핵심키워드로 발전하여,

급기야 ‘짱’신드름을 불러 일으켰다.


고단한 삶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순기능도 하지만,

그러나 무분별한 추종에 따른 반기능도 우려되어

외모, 외형지상주의라는 비판도 맘만치 않았다.

겉과 속이 다르니 우려할 수밖에.......


새해는 ‘맘짱’열풍이 불면 어떨까?

속내도 끝내주는...

그 얼굴에, 그 몸에, 그 솜씨에, 마음(‘맘짱’)까지?


“어느 마을의 시장에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정치가를 찍었더니,

돈 다발이 찍혔습니다.

돈 많은 사장님을 찍었더니,

술과 여자가 찍혀 나왔습니다.

어떤 남자는 늑대가 찍혀 나오고,

어떤 여자는 여우가 찍혀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시장에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흉기가 찍혀 나올 거야!"

사나이가 카메라 앞을 지나갔습니다.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이 찍혔을 뿐,

사나이는 단지 미역 한 꾸러미만을 들고

시장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정채봉의 ‘내 가슴 속 램프’중에서>


그 사진기를 어느 도장에서 잠시 빌려갔다나?

그리고는 사진을 찍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 졌단다.


그 도장의 몇 명은

죽도가 찍혀 나왔다는 소문이....

이름하여 ‘검짱’이란다.


언제나 보이는 사람

안보이면 보고픈 사람

늘 땀을 흘리는 사람

찔려도 아프지(화나지) 않은 사람

잘 베어지지 않는 사람

한번쯤은 베고 싶은 사람

그리고

언제나, 늘, 항상, 꼭 웃는 ‘맘짱’......

이런 사람이 ‘검짱’이 아닐까?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계지덕(木鷄之德)  (0) 2005.10.03
컴플렉스  (0) 2005.10.03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  (0) 2005.10.03
검도일인자...  (0) 2005.10.03
포정해우(疱丁解牛)  (0) 2005.10.03
 

‘물맛’一考,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97)


옛날 고승들의 선사상(禪思想) 문답 중에

“물은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라는 평범하지만 가르침을 주는 언구(言句)가 있다.

물맛을 아무리 얘기해보아야 알겠는가?

‘물을 마셔보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안다’는 비유의 아주 쉬운 진리이다.


요즘 년말의 잦은 모임에서 ‘검도전도사(?)’가되다보니,

자주 듣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들이다.

-젓가락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눞인다며?

-그 나이에 무슨 검도를...골프 어때?

-맨주먹으로도 호신이 될까?

-칼잡이 되려는가?

-일본 것이라며?


하면 나는 답 같지 않은 답을 한다.

“물맛을 아느냐?”고

‘물은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

더구나

-땀 흘려 뛰어온 자의 물맛

-걸어온 자의 물맛

-걷기조차 않은 자의 물맛은 다르다.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


도복을 입어 보았는가?

-바지 선을 정성들여 다리는 마음

-허리 끈을 조이며 다짐하는 마음


호구를 착용해 보았는가?

-갑상을 두르는 마음

-갑 끈을 동이는 마음

-면수건을 두르는 마음

-호면 끈을 조이는 마음


묵상을 해보았는가?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는 마음

-눈을 감아 감사하는 마음

-손을 모아 기도하는 마음

-호흡으로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


발도를 해보았는가?

사자후를 토해 보았는가?

중단세로 몸을 숨겨 보았는가?

‘머리’를 타격해보았는가?

마음을 베어 보았는가?


“너희가 물맛을 아느뇨?”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

(20031226)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컴플렉스  (0) 2005.10.03
검짱  (0) 2005.10.03
검도일인자...  (0) 2005.10.03
포정해우(疱丁解牛)  (0) 2005.10.03
人間世  (0) 2005.10.03
 

‘100인마을’一考, <나는 검도 일인자....>(96)


“세계에는 63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을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100명중 52명은 여자이고 48명은 남자입니다.

30명은 아이들이고 70명이 어른들입니다.

어른들 가운데 7명은 노인입니다.

90명은 이성애자이고 10명이 동성애자입니다.

70명은 유색인종이고 30명이 백인입니다.


61명은 아시아 사람이고 13명이 아프리카 사람

13명은 남북 아메리카 사람, 12명이 유럽 사람

나머지 1명은 남태평양 지역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를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그러나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90%를 사용하고 있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 소유한 자는 100명 중 7명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 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비 피할 집에 살고, 먹을 게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거기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면 굉장한 엘리트입니다.”

-출처 :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케다 가요코)’에서-


한국의 ‘100인 마을’사는 그대는...

그대 혼자만 검도를 할줄 안답니다.

마을의 검도 일인자입니다.

아주 선택받은, 굉장한 엘리트입니다.

(20031222)

'설검(說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짱  (0) 2005.10.03
"너희가 검도를 아느뇨?"  (0) 2005.10.03
포정해우(疱丁解牛)  (0) 2005.10.03
人間世  (0) 2005.10.03
觀行之道  (0) 2005.10.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