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지검
‘忍苦之劍’<검도는 인고(忍苦)의 道다>(33)
不可怨以怨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지니
終以得休息 이러함 알 때 마침내 원한이 그치나니
行忍得息怨 인욕으로만 원한은 그치는 것
此名如來法 이야말로 여래의 진리이니<법구경 ‘雙敍品’>
인욕이 무엇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보자!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데도 그가 이를 받지 않는다면, 그 물건은 누구의 것이 되느냐?”
“물론 원래의 주인이 도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한 욕설을 내가 받지 않는다 할 때, 그것은 누구의 것이 되느냐?”
욕설 따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책임일 뿐이니,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깰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인욕 앞에는, 원한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분하고 원통하고 기막힌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마다 성질을 부리거나 , 원한을 품고서 복수하려고 한다면 이세상은 혼란의 불구덩이로 빠질 것이다. 불교에서는 괴로움(번뇌)의 근본 원인이 욕심(貪), 성냄(嗔), 어리석음(癡)이라고 하여, 탐심으로 괴로워하는 자를 위해 보시(布施)를 가르치며, 분한 마음으로 고통 받는 자를 위해 인욕이라는 덕행을 일러 준다. 물론 인욕이란 분함의 고통만을 참는 것이 아니라 자랑함을 참는 것도 포함하고 있음이다. 자랑은 자만을 낳게 하고 자만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자의 참을 ‘忍’을 풀이하면 마음 심(心) 위에 칼 도(刀)자를 쓴 것인 바, 즉 참은 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칼로 벤다는 뜻으로 검도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검도는 스포츠로서의 일면과, 수양으로서의 일면이 어우러지는 무도이다. 검력을 더해가면서, 고단자에게서 듣는 검도는 마음의 수양 쪽에 무게를 두는 듯싶다. 그래서인지 노검사들에게서는 무인보다는 선사(禪師)의 느낌마져 들곤 한다. 무협지에서도 예외 없이 훌륭한 검객은 도인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실제로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도 노년에는 검객이라기보다 구도자의 일면으로서 ‘독행도(獨行道)’를 유훈으로 남기지 않았는가? 인고의, 인욕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지 않겠는가?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여로(旅路)를 가는 것과 같다(도꾸가와이에야스, 德川家康)’고 했다. 인생은 여의(如意)보다는 불여의(不如意)가 더 많은 것, 서두르지 않고 인고(忍苦)의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은 검도의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그래서 ‘검도는 나이 먹어가는 인생’에 비유했던가? 인생의 희로애락,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환희와 시련 등의 리듬을 검을 통해 忍苦하고, 극복함으로서 일상에 다시 투사(적응)하는 것이 아닐 런지.
빠른 머리가 무엇인가? 짐이 아니던가? 100번 한 만큼 덜어진다.
중단세가 무엇인가? 세척 칼에 몸을 숨기려는가? 고통이다.
연격이 무엇인가? 멀고 먼 여로(旅路)가 아니던가? 고행이다.
기합이 무엇인가? 사자후(獅子吼)가 아니던가? 인고(忍苦)의 포효다.
대련이 무엇인가? 교검지인(交劍之忍)이 아니던가? 상생(相生)의 검이다.
묵상이 무엇인가? 인욕(忍辱)의 호흡이 아니던가? 평상의 도이다.